[단독] 한뫼 안호상 박사 19주기 추모식, 국립현충원에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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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뫼 안호상 박사 19주기 추모식이 21일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1묘역에 위치한 안호상 박사 묘역에서 열렸다.

한뫼 안호상 박사 기념사업준비위원회와 대종교, 한나세계연합, 주)광개토, 피플투데이, 배설선생기념사업회, 사)한국종교협의회, 한민족문화과학교류위원회, 단군정신선양회, 단군단농민문학회, 대한민국건국회, 사)동학민족동일회, 흥암나철선생기념사업회, 사)남북문화교류회가 주최하고 보훈처, 광복회, 국립현충원, 교육부가 후원한 추모식에는 각계 인사와 단체 대표, 회원과 유족 등 30명이 참석했다.

이번 추모식은 원영진 전 대종교 총전교 원도를 시작으로 이수성 전 총리, 김선적 한나세계 대표회장, 김익수 한국사상문화학회장의 추모사, 양종은 수석위원의 추모시 낭송, 정미애 대표가 직접 작사, 작곡한 ‘한뫼 아리랑’의 순서로 진행 되었다.

한뫼 안호상 박사는 1902년 출생하여 1920년에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과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덕학교 (현재 국립 퉁지대학) 예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5년부터 독일의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하여 1929년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예나 대학교는 16세기 중반 설립되어 헤겔, 괴테, 쇼펜하우어를 배출한 유서 깊은 학교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독일 국립 훔볼트 학술재단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33년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철학연구회 1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철학강론을 출간하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해방 이후인 1946년에는 조선민족청년단 부단장을 맡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민국 제1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제시한 ‘하나의 국민(一民)’으로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민주의(一民主義)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뒤에는 학술원 철학 부문 회원으로 활동하며 건국대,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7년에는 대통령 특사로 국제사회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후 1976년에는 유봉영, 박참암 등 6명과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였고,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대종교 총선교(최고지도자)를 지냈다. 이후 경희대학교 이사장을 거쳐, 1999년에 서거하여 사직공원에서 사회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뫼 안호상 박사는 홍익인간 이화세계 (弘益人間 理化世界, 세상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 하는 참된 사람이 되자) 의 이념을 받들어 “뿌리없는 나무는 열매 맺지 못하고, 근원 없는 물은 오래 흐르지 못한다 ” 라고 말하며, 동방예의지국의 찬란한 문화가 외국 문화에 물드는 것을 막으려 힘썼다.

한뫼 안호상 박사의 업적은 크게 3가지로 천부경(天符經)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철학의 기반을 닦은 점, 홍익인간 이념을 한국 교육에 녹아들게 하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인성교육의 원전인 <단군왕검황제의 인간 366사>를 정리하여 인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런 업적이 가진 의의는 서구 사상이 비판없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시점에서 충효를 강조한 국가관 정립, 민족교육과 윤리 교육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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