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혼으로 예술을 탄생시키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눈과 귀가 아닌 마음이다

  • 입력 2018.08.07 14:39
  • 수정 2018.08.07 16:09
  • 기자명 신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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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면 그대로 기억해 그림을 그리는 박정민 불화작가. 귀로 듣는 대신 머리와 눈, 손으로 예술을 탄생시키는 그의 작품들과, 한 폭의 아름다운 예술 그림 같은 인생 스토리를 들으러 물 좋고 공기 좋은 박정민 작가가 있는 곳을 방문했다. 

 

불교를 알게 되고 불교예술의 가치를 깨닫다
4살 때 홍역을 너무 심하게 앓아 결국 청각까지 잃게 된 박 작가는 귀가 들리지 않지만 머리는 뛰어나 한번 본 사물이나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재능을 가졌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이수자인 박정민 작가는 어렸을 때 불교를 접하게 되었고 불교미술을 하게 된 동기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며, 손바닥만 한 종이만 있어도 무엇인가 그려내며 표현했다.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장애가 스스로를 표현하게 하는 몸짓과 언어였다. 박 작가는 유년기 시절, 어둡고 답답한 가슴을 손짓과 발짓으로 표현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제일 가슴 아프게 생각한 것은 부모님이었다. 청각을 잃은 후 어머니께서는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 아들의 청력을 되찾을 생각으로 마을에서 십리쯤 떨어진 오어사라는 절을 찾기 시작했다.

박 작가는 절을 자주 다니면서 불화나 단청을 보고 거기에 매료되어 차츰 어머니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십리 넘는 길을 어린 나이에 직접 찾아갔다. 부처님을 보며 대화하고 자연과도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느끼며 바람에 스치는 처마 밑 풍경을 소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며 불교 예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박 작가는 6살 때 거기서 만난 스님으로부터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이 아닌 거 같다.’ 라는 말과 함께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게 되었다. 아이가 그린 그림이지만 극 사실묘사, 미적 감각과 실력이 뛰어나고 천상세계가 열리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일반 그림이 아니라 부처님을 그리는 일을 하며 복을 쌓으라고 말했다. 스님은 “말이 트이려면 장가를 가야한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까지 했다고 전했다. 

그 시절부터 불교와 예술에 연결해서 그림을 그리며 유년기와 청년기를 계속 이어 왔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박 작가는 부족함 없이 바르게 자랐다. 순수한 마음과 끈기 있는 열정과 노력, 강한 책임감, 부모님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학창 시절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매년 학급 부회장까지 맡으며 학교생활도 성실하게 했다. 귀가 들리지 않아 받아쓰기 실력은 부족했지만 뛰어난 머리 덕분에 이과 계열의 과목은 월등히 잘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불교학이 산실인 동국대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고 동국대 동양화학과에 입학했다. 박 작가 대학교 2학년 때 불교미술학과가 생겨서 박 작가는 불교미술학과 전공으로 바꾸고 동국대 불교미술학과 1회 졸업생이 됐다. 종교가 불교이고 미술도 전공하기 때문에 동양화학과 보다 불교미술학과가 그에게는 더 적합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금채탱화로 명성이 자자하신 원덕문 월주스님(무형문화재 제 48호)께 사사(師事)를 받기 시작하여 하루에 이 백장에서, 몰입하면 오 백장씩 그려내며 밤을 지새우고 항상 그림에 목말라했다. 은사스님의 매몰차고 냉정한 시집살이는 모든 제자들이 손사래 치며 떠나기도 했지만, 박 작가는 스님이 그려내시는 한획한획의 그림에 매료되어 스님과 함께 사찰탱화, 단청, 벽화 등을 배우고 익혔다. 그 때, 스님과 함께 했던 작품의 으뜸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한국 방문을 기념하는 선물로 드린 금채색 병풍이다.

 

평생의 조력자이자 반려자 지금의 아내를 만나다.
불화와 일반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하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740호 도금 기능자, 금박장인 이경숙 작가는 그림 그리는 일 외에도 문화재보수기능장이라는 수식어도 갖고 있다. 이 작가는 금채탱화, 단청, 벽화를 불교 미술로 작업하고 있고 나무, 풀, 꽃 등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녀는 불교 예술, 불화에 의미를 두어 자신의 전공인 피아노를 거의 포기하며, 우연히 대학교 1학년 때 시작한 불교 예술의 뜻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박정민 작가와 이경숙 작가의 만남은 한편의 영화 같았다. 이 작가가 조교 시절인 대학교 때 알게 된 두 작가의 인연은 부부의 연까지 연결됐다. 평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정직함이 몸에 배어 있던 그녀는 남들 보다 실력도 뛰어나고 노력도 하는 박 작가가 청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불의를 당하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나서서 박 작가를 도와주었다. 그때부터 박 작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 이 작가는 박 작가에게는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였다. 처음엔 부당함을 당하는 것이 싫어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녀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같이 다니게 되면서 그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과 성실함, 진정성, 모든 일에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모습에 마음이 갔다. 박 작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대학원 과정을 옆에서 챙겨주며 도와주었다. 그림자처럼 박 작가의 불화 작업을 도왔다. 

20대 초에 알게 됐지만 이 작가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둘의 믿음과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35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내이자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에게 말을 할 수 있게 훈련을 시키며, 예를 들어 젓가락을 말하지 못하면 하루 종일 ‘젓가락’을 말하게 시켰다. 29년째 훈련 중이라고 이 작가인 부인께서 말할 때 취재진들은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렸다. 말하는 훈련뿐만 아니라 글씨는 명필 중의 명필로 잘 쓰는 실력이지만, 간단한 작문이나 문법을 어려워해 가르치며, 음악도 안 들리지만 애를 써가며 피아노도 가르쳤다고 전했다. 그녀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박 작가는 또박또박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으며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청각장애 1급인 그는 보청기를 끼고 생활한다. 거의 상실한 청각으로 미세하게나마 작은 소리가 들리지만, 소리를 듣기보다 사람의 입모양을 보고 대화를 한다고 했다. 

아낌없이 주며 헌신적이고 순수한 부부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애틋하게 인생을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며 귀감이 되는 모습이다. 험난한 세상 항상 해맑은 웃음의 원인은 항상 옆에서 그를 잡아주는 그녀가 아닐까. 박 작가의 어린 시절, 스님께서 결혼을 하면 말이 트인다고 하신 것은 아마 내조를 하며 헌신적인, 지고지순의 부인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은 마음이 취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났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다
박정민 작가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94년도 삼성재단 주최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일본에서 가져온 탱화 50점 전시회였다. 박 작가는 이 전시회에서 시현불화가로 참석했다. 삼성이 일본 측에 요청하여 탱화 그림을 한 달간 빌렸고 고려 시대 때 제작한 탱화를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한 달뿐이었다. 이러한 현실이 안타까웠던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은 박 작가의 실력을 익히 듣고 한 달의 시간 동안 고려 시대 탱화 그림을 똑같이 그려 달라 요청했다. 한 달 동안 잠도 별로 자지 못하고 탱화 그림에 매진했던 그는 한 달 후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며 고려 시대 탱화 그림을 재현했다. 눈에 익히고 머리에도 익혀야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 그의 실력은 인정받았고 일본 쪽에서는 그의 예술 작품 세계를 국보급으로 인정한다고 전했다. 작품 주문은 쇄도했고 일본 쪽에서는 그의 작품을 비싼 값에 팔더라도 사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박 작가는 “고려불화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내 혼마저도 빼앗아 가는 거 같아 난 안하겠다.” 라며 단호하게 일본 측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애착과 아쉬움이 있는 작품은 충북 진천 보탑사에 있는 ‘지장탱화’, 자랑스러운 작품은 불국사 ‘괘불탱화’ 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박 작가의 작품은 미국 뉴욕에 있는 조계사의 지장탱화와 일본 석남정사의 신중, 후불, 지장탱화, 군부대 51사단의 호국 웅비사 등의 탱화, 도선사, 용주사, 만기사 그리고 계룡대의 단청작업, 경기 도립박물관 채색 작업, 해인사, 불국사, 은해사, 백흥암, 위봉사 등등 수많은 개금보수, 단청, 탱화, 전통사찰의 문화재보수를 하고 또한 박 작가의 혼이 담긴 새로운 불교작품과 불교 예술의 미적 가치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신념과 앞으로의 계획
조계종포교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는 박 작가는 교도소 군 법당으로 자원 봉사를 하러 가고  노인 복지원에서도 봉사를 한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군인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국가를 보전하고 보호한다는 이념을 불교신앙인 호국 불교로 연결 짓는다. 그래서 군부대에 가서 봉사를 하고 온다. 군인들을 좋아하기도 하며 식량을 부대에 가서 직접 갖다 주고 수입의 3/10을 군인들에게 빵, 떡을 주는 것으로 사용한다고 전했다. 

박 작가 인생의 좌우명은 ‘세상을 다 내 마음같이, 부처님같이.’ 라고 밝혔다. 이 작가의 인생의 좌우명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고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원시불교의 경전인 숫타니파타(Suttanipata)에 나오는 시구(詩句)로서 “어떤 유혹이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주관대로 행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시회를 하는 것이 부부의 현재 계획이자 올해 계획이다. 사람들이 ‘불화 하는 사람이다’ 말고 ‘종합 미술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폭 넓게 바라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래서 이 작가는 불화 작품뿐만 아니라 일반 작품도 하며 불교 미술 하는 사람이라 딱딱하고 종교성만 있는 사람으로 보는 편견이 없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올 12월에는 프랑스 르몽 박람회에 작품이 초대를 받아 출국을 하게 된다. 이번 기회에 유럽 쪽에서 불교미술과 현대미술을 접목시켜 발전하는 예술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포항에 있는 오어사의 단청 작업도 진행 중이다. 미래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전통을 현실 속에 함께 갈수 있게 눈높이를 맞추어서 사람들이 전통 불교미술을 일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생활 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고 밝혔다. “불교미술은 과학이고 수학이며, 문학이고 종합예술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고 보급 시키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예술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이름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미(美)와 실력을 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길 바랍니다.” 라고 부부는 전했다. 작가 부부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날이 곧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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