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제조각의 미(美)를 보다

단단한 쇠가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태어나는 순간

  • 입력 2018.09.20 14:58
  • 수정 2018.09.20 16:25
  • 기자명 신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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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례나 조각가
정혜례나 조각가

예술을 만나다
정혜례나 조각가는 초등학교 입학 전 신문지 낙서 하던 게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어렸을 때 미술계열 그림을 전공으로 할지는 전혀 몰랐다. 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렸지만 미술대회를 나갈 때마다 상도 받은 적 없어 스스로가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학교 선생님이 정 작가가 대회에 떨어진 이유가 궁금해 미술 대회의 심사위원에게 이유를 물어봤고 심사위원은 ‘이 그림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아니다.’ 라는 간단한 이유를 됐다. 아이들이 참가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상을 받는 그림의 기준은 아이들이 그린 거 같이 보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녀의 작품은 어른이 그린 것처럼 보였고 다른 아이들의 그림과는 달랐다.

그녀가 재수를 할 당시 민정기, 김호득, 오윤, 석형산 네 분의 선생님들이 운영하고 계시던 ‘서대문미술학원’을 다녔다. 가을을 넘어서 찾아갔지만 어느 미술 계열로 갈지 고민이었다. 예고시절에는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재주가 없었다. 회화는 아닌 것 같았고 디자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올라간 조소실에서 흙에 반하게 되었고 오윤 선생님에게 “흙을 만져보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오윤 선생님은 입시가 한 달여 남은 시점에서 난감해하셨지만 허락하셨고 그녀는 도구를 쓸 줄 몰라 손으로 아그리파를 조물거리며 만들었다. 3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그것을 바라보던 오윤 선생님은 “조소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정 작가는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하였다. 그때가 1983년 이었다. 정작가의 서울대 재학시절은 한창 민주화 운동으로 나라가 어수선하였고 정작가도 친구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던 시절,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총학생회에선 대대적으로 시험거부를 요청했고 그녀는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움직임의 하나인 시험거부에 동참했다. 그로 인해 200~300여명의 학생들이 대거 퇴학처분을 받아야했다.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한 일의 결과는 나약한 학생들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로 남았다. 

정 작가가 만난 사회의 모습은 모순덩어리였고 더군다나 학생의 신분에 예술 공부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절망의 끝은 깊고도 어두웠다. 설상가상으로 스승이셨던 오윤 선생님이 작고 하셨다. 이후 정 작가는 잠시 중앙대에 몸을 담았지만 서울대에 다시 복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철제조각을 통해 행복을 느끼다
그녀의 조각은 몸으로 뛰어야 하는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라 했다. 몸은 힘들지만 조각이라는 예술이 스스로에게 만족스럽다고 했다. 다양한 재료를 다루는 것, 특히 정 작가의 주소재가 철제인데 그 단단한 질료에 푸욱 빠져있었다. 3차원의 공간을 다루는 작업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멀티적이며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와 개별성을 동시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었다.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 그녀의 초대조각품 ‘춤추는 사람’이라 밝혔다. 고마운 것은 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이 시집을 간 것이고 아쉬운 점은 그녀가 소장하지 않고 있는 관계로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아쉬움이 있다면 대학을 다니던 시절 그렸던 드로잉이나 작품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달라고 하면 주기도 했고 작업이 끝나면 더 이상 보기가 민망하다고 느꼈다. 스스로가 발가벗고 공공의 장소에 서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것이었다. 그녀의 흔적들이 작업의 행보를 여실히 드러내는 귀한 자료였음에도 정작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는 것. 그것은 아련하게 가슴 한편에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녀는 조각을 통해서 관객들과 소통을 할 때 ‘내 작품이, 내가 살아있구나’를 느낀다. 또한 자신의 작품이 작가를 떠나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타자와의 관계가 새로이 형성될 때 예술가로서의 사회적인 역할수행을 감당한다고 느낀다. 

인생의 멘토와 좌우명을 묻는 질문에 “그리스도와 가족과 친구, 저에게 아픔을 주는 존재들입니다. 자연환경 역시 저에게 영원한 멘토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좌우명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입니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면 자유로워집니다.”라고 답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예술 작업을 하고 싶다”며 “작업을 통해서 관객들을 제작품에 참여시키고 싶습니다. 관객 분들께 작품과 맘껏 놀아보세요!” 라고 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남겼다.

남아있는 기억과 앞으로의 계획
정 작가는 조각가로서 열 네 차례의 개인전과 130여 차례의 단체전을 가지며 많은 경험을 쌓았다. 많은 전시회를 가졌지만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전시회로 두 번째 열었던 전시회를 꼽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전시회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회관에서 열었던 두 번째 전시회입니다. 사실 전시회에 작품을 걸 때 평균 20점 정도를 전시합니다. 그런데 이전시를 기획한 이덕주 교수님이 저에게 작품 50점을 요청하셨습니다. 전시회까지 시간도 짧았고, 사실 불가능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시회 전까지 작품 50점 이상을 완성했고 전시회 때 관객들에게 제 작품을 많이 보여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열정적으로 몰두했습니다. 관계자분들은 제 전시회를 위해 전시장 공간을 새롭게 세팅까지 해주셨고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이때 보람을 느꼈고 안 되는 것을 되게끔 한 것, 안 되는 상황에서 작품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은 유연한 사고가 주었던 긍정적인 에너지였습니다.”    

하반기에도 관객과의 소통의 자리를 준비 중이다. 10월 15일 홍천문화예술회관에서 홍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며, 10월 31일부터는 평창동의 아트유저에서 전시하며 관객들과 소통한다. “훗날 미래의 계획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대중과의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미술은 어려운 것이 아닌 친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분들이 어려움 없이 예술에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쇠를 자를 때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황홀하다고 느낀다. 무겁고 차가운 철판이 열에 녹으면 유들유들하게 변하니 그 대조적인 순간들을 즐긴다. 극과 극 그 둘이 하나인 지점, 찰나가 주는 완벽에 가까운 조화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만나는 한 지점에서 그녀는 시간을 향유하게 된다. 작업은 원형의 세계에 몰입하여 초월에 대한 보편적인 갈망을 드러낸다. 그녀는 조각을 사랑한다. 조각에 대한 열정과 갈망은 식을 거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들은 활기차고 역동적이다. 관객들을 향해 ‘나를 봐주세요.’라고 소리치며 웃음을 짓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철제 작품들은 눈길을 끌게 만든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예술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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