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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색 백자에 새긴 인생

기사승인 2019.08.16  09: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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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수 명장

지난 5월 17일부터 26일까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도자재단,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함께한 ‘2019 공예주간’이 개최됐다. 공예주간의 일환으로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통인화랑에서 한국 전통 도예의 맥을 잇고 있는 이천 명장(名匠)들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공예주간을 맞아 기획된 이 전시는 한국 미감의 정수가 담긴 이천의 명장들의 도자를 통해 우리의 과거에서 현대로 이어지고 있는 도자조형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다. 도자기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이지만 전통 가마를 고수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전통 가마는 장작만으로 온도를 올리기 때문에 불 때는 이의 인내와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전통 가마를 고수하는 대한민국 명장 14호이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사기장 41호 서광수 명장을 만나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전통 장작가마, 서광수 명장의 이유있는 고집

통인화랑 5층에 마련된 명장 전시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었다. 도예에 있어 문외한이 사람이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작품이었다. 알고 보니 서광수 명장의 ‘청화백자 철화진사 매화문 호’였다. 색감은 물론이거니와 매화의 꽃술 가닥 가닥이 선명히 보였다. 서 명장 또한 이렇게까지 색이 선명한 작품이 장작가마에서 나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팔각매죽호, 팔각백자호 등 서 명장의 작품 세 점이 통인화랑에 전시되어 있었다.

일생을 도자기와 함께한 서광수 명장은 철저히 전통 방식을 따라 장작가마에 구워 도자기를 제작한다. 서 명장은 1년에 총 네 번 가마를 뗀다. 서 명장의 호(號)인 ‘한도’를 딴 한도요에서 3개월마다 개요식을 갖는다. 한 번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긴 기다림 끝에 가마에서 나온 작품 모두가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서 명장의 신념이 담긴 백자 항아리는 곧 서 명장 자신이나 다름없기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망치로 내리쳐 깨버린다.
사실 전기나 가스가마를 사용하면 더 쉽고, 성공적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지만 전통을 지키는 것은 서 명장이 그간 지켜온 신념이다. 그의 노력을 아는지 불의 심판은 서 명장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그야말로 장인정신이 담긴 그의 가마에서 탄생한 백자는 가장 완벽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전통 장작가마에 사용되는 불은 예측할 수 없는 색감을 빚어냅니다. 똑같은 그릇이라도 불을 많이 받는 곳과 적게 받는 곳, 불의 온도 등에 따라 빛깔 등이 다 다르죠. 균일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을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도예에 바친 58년, 돌이켜보면 ‘운명’이었다
서광수 명장이 도공의 길을 걷게 된 지 어느덧 올해로 58주년이다. 1961년, 서 명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자기 공장에 발을 들였다. 그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의 운명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고된 일에 지치기도 했지만 밤에도 혼자 호롱불을 켜놓고 몰래 도자기 물레를 차며 재미를 느꼈다고 한다. 서광수 명장은 스승인 지순택 선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1960년 중반 지순택 선생이 경기도 이천으로 와 고려도요를 세웠습니다. 당시 이천에는 도자기 공장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지순택 선생도 처음에는 제가 다니던 도자기 공장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 때 어린 나이에 열심히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좋게 본 것인지 저를 고려도요로 데려갔습니다. 그게 지순택 선생 밑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죠. 이후 1976년까지 고려도요에서 물레 성형이며 조각이며 도자기에 유악을 바르고 불가마에 넣어 굽는 소성 등 전통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습득했습니다. 저의 참 스승인 분이시죠.”

이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씨가 세운 도평요에 들어가 10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곳에서 대기업 버금가는 임금을 받으며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마침내 1986년, 한도요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 인정받는 도공


하지만 명성만으로는 한도요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 명장은 한도요를 운영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다른 도공 밑에서 일을 할 땐 그저 도자기를 잘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면, 한도요는 나의 명예와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기에 자신이 있으면서도 직원들과 판매까지 책임지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이 일이 일정한 수익이 발생하는 일이 아니기에 금전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가마를 한번 떼기 위해선 장작만 해도 천만원이 넘어갑니다. 질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려면 화력이 센 강원도 소나무를 사용해야 하고, 이 밖에도 흙과 돌, 유약 등 어느 하나 최상의 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 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마어마한 시간과 정성을 쏟아 부어도 구워져 나오는 것에 30%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서 명장은 언제나 자신이 있었기에 묵묵히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이윽고, 일본시장에 진출하면서부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서 명장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사랑받는 도자기 명장이다. 2009년에는 일본 국영방송 NHK에서 한국도자기 명장 특집으로 서광수 명장을 다룬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실제 서 명장의 고객 95% 이상이 일본인이었으며, 매년 일본에 가서 3~4번의 전시회를 여는 등 명성과 작품을 인정받았다.

일본에 이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서 명장의 작품에 주목하고 있다. 색채와 오묘한 아름다움, 그리고 한국 특유의 도자기 제작기법은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대영박물관에서 여러 차례 그의 작품이 초청받은 바 있으며 현재도 작품이 유럽 전역의 박물관에 전시되며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서광수 명장은 문화부장관으로부터 공로상을 수훈하기도 했다.

 

머지않은 ‘60주년’을 기다리며…


서 명장은 후학 양성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매주 월요일, 화요일에는 이천도예고등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 명장의 손재주를 물려받은 것인지 가족 모두 도예에 조예가 깊은 모습이었다. 특히 서 명장의 조카가 도예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다며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과거 전국의 내로라하는 도예가들이 모이는 ‘전국기능경기대회 도예 · 성형분야’에서 학생 신분임에도 3위에 입상하며 실력을 증명했다. 조카는 현재 서 명장의 기능 이수자 3명 중 하나이다.

또, 체력을 요하는 일이니 만큼 체력 단련에도 힘쓰고 있다. 지금은 오랜 세월 물레를 발로 차다보니 발목이 약해지긴 했지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여전히 산을 오르내린다. 그는 전국에 자신이 가보지 않은 산이 없다며 웃어보였다.

서광수 명장은 당분간 내후년에 있을 60주년 기념 전시를 위한 작품 작업에 몰두하고자 한다. 서 명장은 세월이 허락하는 한 온 힘을 다해서 도자기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예에 있어 누구보다 넘치는 애정을 가진 서광수 명장. 
마지막으로 서 명장은 자신의 이름을 건 도예박물관을 짓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후학들이 우리의 도자문화를 계승해나가고, 한 평생 걸어온 도공의 이야기를 그 곳에 오롯이 풀어놓고 싶다는 게 서 명장의 바람이었다.

도자기를 굽는 1300℃ 가마의 온도처럼 식지 않을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예솔 기자 yesall429@naver.com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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