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용필 칼럼]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나서

실업급여 수급 마지막에 부쳐

  • 입력 2019.09.16 19:46
  • 수정 2019.09.16 19:47
  • 기자명 황용필 <걷기 속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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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로 퇴사하고 연 초에 실업급여 수급자가 되었다. 
경험자라면 느꼈겠지만 첫 교육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역전의 예비군 같은 너스레하고 홀가분한 심정보다는 까닭 모를 감정으로 섧고 추리하다. 
맞다. 비틀즈(The Beatles) 'Yesterday' 가사처럼 “갑자기, 예전의 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Suddenly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심정 말이다. 그땐 손을 잡아준 사람들이 눈물 나게 고맙다.

'취업희망카드'를 쥔 순간 설마 끝까지 수급자가 되리라곤 꿈도 안 꿨다. 
다양한 경험과 노련한 경력은 금방이라도 손짓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학교나 직장보다 시간과 숱한 거절만큼 나를 가르쳐 준 것은 없다.
실직 등 이직으로 구직급여 수여자가 되어 일정한 취업상담(실업인정)을 받게 되면 최장 240일 동안 실업급여 수급자 자격이 주어진다. 
연령 및 피보험기간 등을 고려해서 소정급여가 지급되는데 올 1.1. 이후 이직자의 현행 소정급여일수는 90일에서 최장 240일 동안, 1일 60,120원에서 66,000원이 지급되는데 통상 한 달 최대 28일 치를 계산해서 지급된다.
그런데 강연이나 기고, 자문활동, 아르바이트, 일용근로, 수습근로 등으로 소득이 발생한 경우에는 당일 급여는 지급되지 않는다. 묘한 아이러니다. 
현직 때 겸직제한법으로 제약받은 강연이나 기고, 자문활동 등은 큰 자산이자 재취업 마중물이 될 수 있는데도 활동 당일 실업급여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많다. 전문적인 강사나 작가가 아니라면 일률적으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한 달에 몇 건 혹은 일정 금액을 정해서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것이 재취업을 돕는 방편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저임금의 월급액과 비슷한 실업급여라 할지라도 퇴직자들에게는 재취업을 돕는 소중하고 귀한 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구직활동을 인터넷으로 전송하면서 느낀 감정은 불안함보다 일종의 족쇄를 벗었다는 자유로움이 드는 까닭은 왜일까? ​흔히 늙으면 욕심도 재미도 없어진다고 한다. 
실제로 나이를 들고 보니 모양만 다를 뿐 그 정체는 탈피하면서 지속한다.
어렸을 때 핵심공부 국영수가 중년에는 문사철로 위장했다가 장년에는 음체미로 변모한 것처럼 젊었을 때 진급이나 영향력, 명예들이 노년에 그것은 건강과 돈(연금), 관계(친구)의 사슬로 연결되는 것이다.     
 
파부침주(破釜沈舟),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배를 가라앉힌다는 말로 고대 중국 진(秦)나라 말기 항우(項羽)를 비롯한 영웅들이 천하를 다툴 때 결사각오로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실업급여종말은 소중한 돈 단지가 깨뜨려졌다는 일종의 조종(弔鐘)이다.
그럼에도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미리 써놓았다는 묘비명처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중국 당나라 때 엄양 스님이 선승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그 경계가 어떠합니까?" 
이에 조주 스님이 "내려놓거라(방하착, 放下著)."라 하였다. 
엄양이 "한 물건도 가지지 않았는데 무엇을 방하착합니까?"라고 묻자 
"그럼 지고 가거라(착득거, 着得去)."라고 답하였다. 

그렇다. 무소유(無所有)에 무심(無心)이 최고인 듯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지지 않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다. 배우 현빈이 조선의 왕자 이청으로 분한 영화 <창궐(猖獗)>에서 큰 아들의 자결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항변하는 부왕에 처신에 분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죄"라고.
 
길이 끝나는 지점은 또 다른 출발점이자 전환점이다.
비록 하나의 솥뚜껑이 깨졌다 할지라도 나는 나만의 삶의 무게와 책임을 지고 익은 얼굴로 웃음 지으며 스스로 만족하여 길을 걸을 것이다. 
일러 가라사대, "파안자족(破顔自足)"의 삶이다!  

 

Profile
성균관대 겸임교수
정치학박사 
「걷기 속 인문학」저자

前 국민체육진흥공단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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