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로 그려낸 자연의 시간

엄시문 작가

  • 입력 2019.10.17 13:40
  • 수정 2019.10.17 14:35
  • 기자명 박예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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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큰 돌덩어리가 산을 구르고, 물을 타고 흐르며 부딪치고 갈라지며 자갈로 변하고, 또 풍파를 견디며 부스러진 결과 모래가 된다. 혹은 해안에서는 파랑과 연안류, 바람 등으로 모래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모래들이 아름다운 모래 해변을 형성한다. 생성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색을 지닌다. 

모래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존재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물질이기에 유년시절 모래를 가지고 놀던 추억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해변에 가서 모래찜질을 하거나 모래성을 쌓기도 하고, 모래로 시계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모래를 엄시문 작가는 캔버스 위에 옮겨놓고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모래에 담긴 따뜻하고 부드러운 시간 
그 시작은 국내에 극사실주의가 유행을 하던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시문 작가 또한 화단에 발을 들이면서 극사실주의 작업에 몰두했고, 아스팔트 위 뿌려진 모래의 리얼리티를 위해 실제로 모래를 사용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극사실적 표현을 통해 '물질과 표현의 역설적 관계', '허상과 진실의 모호성 탐구'에 열중하던 시기에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물질로 모래를 선택했다. 이제 그의 작가인생에서 모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요 소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남한강 강변에서 모래를 만지며 놀던 그리운 기억이 깊게 남아있습니다. 페이퍼 작업이나 피스 작업, 프로타주 작업 등에 집중한 시 간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모래 작업으로 돌아오곤 했으니, 저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자 그 자연을 표현하는 최고의 재료인 셈입니다." 

모래는 작가는 물론, 보는 이들도 유년시절을 떠올릴 정도로 서정성을 지닌다. 그의 작품이 부드러움을 지닌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터전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특히 감성이 풍부한 유년 시절에 마주했던 인상 깊은 추억들은 세월이 흐른 먼 훗날에도 여전히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다. 

 

흩어지는 모래로 표현한 다채로운 조형미 

엄시문 작가는 모래 하나로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모래가 있는 곳이라면 국적과 지역을 불문하고 어디든 달려가 수집해 오곤 한다. 그가 사용하는 모래들은 천연 모래로, 검은 모래, 하얀 모래, 노란 모래 등 여러 장소, 다양한 지형에서 직접 채취한 모래를 이 용해 다채로운 기법으로 작품을 표현해낸다. 

또, 때에 따라서는 돌, 벽돌, 옹기, 테라코타 등을 쇠 절구나 맷돌, 분쇄기를 이용해 분쇄하여 필요한 색과 원하는 입자를 만들어 사용한다. 밀가루처럼 곱게 갈린 모래가루부터 굵은 입자의 모래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엄시문 작가의 재료 선택은 모래의 물질성과도 관련이 있다. 모래는 특성상 응집력은 없기 때문에 다른 물질과 혼합되었을 때를 제외하면 쉽게 흩어진다. 모래는 소멸하거나 지워지기 쉽고, 흩어지기 쉬운 세계를 표현하기에 탁월하다. 모래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 채 자연과 인간 세계에서 사라지고, 잊혀지고, 잃어버리게 된다. 

그 특성에 의해 생겨나는 다채로운 조형성에 몰입했던 작가로서의 순수한 탐구심, 그리고 모래에 대한 탐구과정에서 겪은 체험들이 자 연스럽게 모래의 조형적 특성과 만나 그의 작품 세계를 탄생시켰다. 

"모래가 깔린 캔버스를 바깥에 내놓자 그 위에 빗물이 떨어져 남긴 흔적 등 ‘우연’이 만들어 낸 것이 작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모래 위에 의도적으로 물을 뿌리거나 입으로 불거나, 쓸어 내거나 진동을 주는 등 의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 모든게 모래가 주는 다채로움이지요." 

변종필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모래라는 물질 위에 표현한 작가의 조형성 탐구를 중심으로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은 크게 직선, 원, 점 따위의 기하학적 형태가 화면을 주도하는 시리즈와 자연이나 인위적 행위의 개입으로 우연의 효과로 얻어지는 형상을 그대로 흡착시켜 완성한 시리즈로 나눌 수 있다"면서 "기하학적 형태가 주를 이루는 시리즈가 이성적이라면,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한 시리즈는 감성적이다. 또 달리 표현하자면 전자는 서구적, 후자는 동양적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삼각형과 사각형으로 단순화하고 직선을 교차하거나 다양한 길이나 두께를 사용해 표현한 작품들은 도시적이며 서구적이다. 일정한 간격의 동심원을 반복하거나 직선을 활용하여 그려낸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듯 직선이 주를 이루는 시리즈는 인공적이다. 반면, 휩쓸리거나 흩어지기 쉬운 모래의 특성을 활용해 자유로운 선과 우연성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은 자연 적이다. 물결이 휩쓸리면서 남긴 흔적, 여기에 흐르는 구름, 스치는 바람, 수목의 가지 등이 표현된 작품은 곡선적이며 동양적이다"고 평론하기도 했다. 

 

'동물세계'로 바라보는 '인간세계' 
이러한 가운데, 엄시문 작가가 10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중에는 지금까지 즐겨 사용한 바람, 구름, 산, 나무 물, 흙 등 자연적 조형언어 대신 새롭게 등장한 동물형상이 눈에 띈다. 

한적한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엄시문 작가는 삶의 터 주변 에서 흔히 보이는 길 위의 흔적, 갈라진 시멘트, 논과 밭의 골, 도시의 건물, 바닥에 번진 물의 흔적, 쓰러진 고목, 앙상한 나뭇가지, 동물원 의 동물, 로드킬 당한 고라니 등은 삶과 죽음, 구속과 해방, 과거와 미래 등에 대입하고 교감하며 작품으로 재구성했다. 
동물의 세계는 약한 동물이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구조다. 먹고 먹히는 이 관계가 누군가에겐 평등하지 못해 보일 수 있으나 ‘먹이사슬’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유지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이렇듯, 약육강식은 자연생태계를 유지하는 법칙이자 순환과 공생 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 던 사회도 존재했고, 전쟁을 통해 권력을 쥐기도 했다. 인류의 역사를 약육강식이 지배한 역사로 보는 시각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가 철저하게 반복돼 왔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도 공존공생의 법칙을 벗어나면 붕괴하고 만다. 결국, 동물세계든 인간세계든 약육강식보다는 공존공생의 원리가 작동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엄시문 작가가 동물 시리즈에 담고 있는 메시지다. 땅의 이미지를 표현한 시리즈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인간에 의해 변형된 땅은 생명을 잉태하고, 성장시키는 모체로서의 역할을 잃어간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흙의 본성을 다른 존재로 변질시키는 현상은 동물 시리즈를 통 해 바라본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시문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주의 모든 만물이 공존하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자연의 이상향을 꿈꾸며 이를 작품에 담아 세상 사람들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속적으로 대화하고자 한다. 

 

50년 화업을 돌아보며… 
한편, 이번 개인전이 더욱 특별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와 함께 1981년 ‘엄지화실’에서 만난 제자들과 별도의 전시실에서 '8119전'을 함께 열기 때문이다.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뜨거운 청춘을 함께했던 이들의 깊은 애정과 믿음이 모 여 마련된 자리다. 

"어느덧 제 나이가 60대 후반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번 개인전이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50여 년 화업을 정리 하고 다음을 도모해야겠다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5회전 이후 10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작업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가장 힘든 시기였기에 가족과 제자들, 주변 지인들의 응원 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전시를 열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기회를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세월에 휩쓸린 모래가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나듯, 엄시문 작가 또한 희로애락이 담긴 50년 예술인생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되길 응원한다. 

Profile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경희대, 추계예술대, 경기대 강사 역임 
수유여중, 북악중, 면목고, 태릉고, 서울공고, 서초고, 
송파공고, 창덕여고, 방산고 근무 

개인전
1988 제1회 개인전(관훈미술관) 
2003 제2회 개인전(세종문화회관) 
2004 제3회 개인전(분당성요한성당 화합의 장) 
2007 제4회 개인전(갤러리 각) 
2009 제5회 개인전(한전아트센터 갤러리) 
2019 제6회 개인전(인사아트센터) 

단체전
한국미술대상전, 앙데팡당전, 대한민국미술대전, 
한국현대미술작가 초대전, 서울 현대미술제, 
아시아국제미술전람회, 이후전, 창작미술협회전, 
송파미협전, 여주미협전 등 단체전 250여회 

작품소장
서울시립미술관, 경희대학교, 필립보생태마을, 신화전자, 
한전아트센터, 갤러리회 

現 
한국미술협회, 창작미술협회, 이후전, 송파미술가협회, 
여주미술가협회, 8119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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