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애 칼럼] 공감, 나를 확장시키는 신의 선물

  • 입력 2020.01.03 20:08
  • 수정 2020.01.03 20:12
  • 기자명 조신애 K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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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번 칼럼에서는 한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에 대한 작은 통찰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친구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넘어졌는데 인대가 파열해 수술해야 한다고 한다. 가족이 병간호를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다음날 수술 일정을 앞두고 혼자 입원해 있었다. 친구는 서럽고 무섭다며 눈물을 비춘다. 혼자 있는 친구가 안쓰러워 같이 있어 주었다. 돌아다니며 수술 후 필요한 물품도 사러 다니고, 우스운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병실에서 먹는 밥이 은근 운치 있느니 해가며 멋모르고 들떴다.

다음날 친구는 수술을 했고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걷던 친구는 온데간데없다. 친구는 가만히 있어도 온몸을 에이는 통증으로 아파했다. 그곳엔 고통뿐이었다. 신음소리와 괴로운 뒤척거림만이 적막한 공간에 흘렀다. 뭐라 위로할 말도 없었다. 꼼짝하지 못하는 친구는 그저 누워만 있었다. 물을 달라면 물을 입에 축여 주었고, 핸드폰을 달라면 핸드폰을 들려주고, 이불이 불편하다 하면 만져주었다. 신음소리만 근근 이어지는 적막한 공기가 흘러서 숨쉬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친구가 소변이 마렵다고 했다. 우리는 난감해졌다. 친구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헤매기 시작했다. 소변통을 들어주었는데, 자기가 혼자서 해보겠다며, 커튼 밖으로 잠시 나가있으라고 했다. 20여분 애를 쓰던 친구는 결국 포기하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구 앞에서 소변통을 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친구의 옷을 벗겨야 했다. 민망하고 낯부끄러웠다.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소변 통을 친구의 엉덩이 밑으로 집어넣어야 했는데, 움직일 수 없는 친구의 몸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수술한 곳에 자극이 가서 고통스러워해서 손이 덜덜 떨었다. 소변통 하나와 씨름하며 우리는 3,40분이 넘도록 쩔쩔맸으며 식은땀을 흠뻑 흘렸다. 

소변통을 놓고 쩔쩔매는 우리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속수무책의 감정이 느껴졌다. 인간이 힘이 없게 느껴졌다. 일을 보고 꺼내드는데 소변통에서 소변이 넘실거려 손과 침대와 옷을 적셨다. 나는 마치 묵언수행의 거룩한 의식을 치르듯 친구의 몸과 엉덩이, 그리고 주변 침구에 묻은 소변을 닦아냈다. 둘 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꺼내드는 소변통이 따땃했다. 시큼한 냄새가 코앞에서 느껴졌다. 혹여 내가 순간 그 냄새에 곤욕스러운 표정을 짓진 않았는지 신경을 쓰며, 짐짓 아무렇지도 아닌 듯 소변통을 들고 재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세척을 하고 화장실 한편에 그 통을 세워두면서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영혼이 탈탈 털린 것 같았고, 적나라한 생의 한가운데서 나도 발가벗겨진 채 소변을 본 것같이 수치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툰 병간호에 조금씩 노하우가 생겼다. 그 병실 안에서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을 같이 겪어냈다. 며칠이지만 그러고 나니 우리는 묘하게 끈끈해졌다. 오랜 시간을 보아왔어도 겉으로만 가까운 것 같던 친구였는데, 뭔가 모를 깊은 전우애가 느껴졌다. 

몸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번 일을 보면서 나는 공감하는 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에는, 특별히 아픈 경험을 하는 이들을 공감한다는 것에는 나에게도 그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픔의 크기가 크던 작던, 그것이 신체적 아픔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우리는 상대를 공감하기 위해선 잠시 상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감정이입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상대의 고통을 느끼는 것과도 조금 다르다. 우리는 그 고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상대의 밖에서 서서 '아 정말 아프겠다. 너무 힘들겠구나!' 하며 그 고통을 느끼는 것만이 아닌, 상대와 함게 그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가, 같이 불편해지고, 같이 속수무책이 되고, 같이 헤매는 것이다. 그 고통을 같이 겪어 내는 것이다. 

소변통을 들고 함께 느낀 생의 민망함, 수치스러움, 무기력함, 곤욕스러움 등의 정서를 함께 겪어내니 깊은 위로가 찾아온다. 진정한 공감은,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겪어내는 과정 중에 얻어졌다. 며칠간의 병간호를 마치고 세브란스 병동을 나오는데 세상이 새롭게 느껴졌다. 나 자신이 무언가 다른 차원으로 성숙한 듯한 신비로운 느낌도 들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같다고 할까? 전보다 더 자유롭고 유연해진 느낌이었다. 함께한 고통 속에 선물을 얻었다. 

 

공감이란 것은 남을 위해서뿐만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도 경이로운 선물이다. 소외시킨 이들, 버려진 감정들, 외면했던 상황들에서 도망치지 않고 머무르는 용기를 가짐으로, 남을 수용하며 동시에 나 또한 담겨진다. '나'란 존재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는 과정 속에 '공감'이 있다. '공감'이라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라고 주신 신의 선물이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일부를 되찾게 되며 조금씩 온전함으로 나아간다. 신은 우리에게 한계를 주셔서 늘 막다른 길목에 서게 하지만, 그 한계에서 다시 날아올라 새로운 차원으로 변환되는 초월의 능력도 주셨다. 5차원의 존재로 넘어가는 문. 그곳에 공감이 있다. 

 

Profile 
(사)한국코치협회 인증 프로코치 KPC(Korea Professional Coach)
연세대 상담코칭학 석사
에니어그램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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