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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사의 큰 물결, 예술·역사·문화의 '통섭'으로 백년대계를 말하다

기사승인 2020.04.21  17: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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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랑 이종상 화백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주변국과의 크고 작은 마찰 속에서 유구한 역사를 써내려왔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와 역사를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모양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를 바로 알고, 깊이 알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한다. 이러한 가운데, 일랑 이종상 화백은 마치 오늘날의 독도 영토문제와 동북공정 논란을 수십 년 전부터 예견이라도 한 듯 1960~1970년대부터 끊임없이 역사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종상 화백을 설명하기 위해선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그는 최초로 60년대  이미 문화영토론을 주창하며 고구려벽화 논문 발표와 함께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또 70년대에는 한국 최초 독도화가로서 독도문화심기운동 NGO활동을 펼쳐왔으며, 동시에 37세에는 현행 5000원권을 그린 최연소이자 최초의 지폐영정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현행화폐 중 최고액권인 5만원권도 그가 그려내며 세계 최초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 화폐를 완성한 화가로서 자기가 그린 화폐를 온 국민과 함께 쓰고 있는 유일한 생존작가다. 
이처럼, 한국현대미술의 거장인 그의 예술인생은 대한민국 현대미술의 역사나 다름없다. 이 화백의 호인 일랑(一浪)은 한학자 월당(月堂) 홍진표 선생이 대학 재학시절에 지어준 그의 아호다. 첫 번째 파도 혹은 높고 큰 물결을 의미한다. 피플투데이 신년호를 통해 그가 대한민국 현대예술사에 일으킨 큰 물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고구려·독도', 문화로 수호하는 우리의 것
이종상 화백은 1961년부터 우리 회화의 자생성과 문화 족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고구려벽화 연구였다. 당시 6·25 전쟁의 여파로 인해 고구려와 고려문화에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도 북한 정권의 고려연방제를 찬양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이 화백은 국전 수상작들 모두 그 당시 노동현장을 소재로 삼았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불온사상가로 몰려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문화의 뿌리인 고구려·발해·고려 미술이 북한과 중국 땅에 위치해 있기에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을 통해 물러서지 않고 역사왜곡과 맞서고 있다. 1977년에는 광개토대왕의 국가 표준영정을 맡아 그리기도 했다. 이는 그가 영정화를 통한 자생문화와 역사를 공부하고자 수많은 선현들의 영정화를 탄생시킴으로써 인문학적 통섭의 화가로도 명성을 알리는 기반이 됐다.
또, 아무도 독도에 관심을 두지 않던 시절 직접 독도를 방문해 최초로 독도 진경화를 그려냈고, 독도(DOKDO)를 일본은 물론 해외에 널리 알림으로써 세계 최초의 독도화가이자 독도문화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화백은 그의 철학인 문화영토론을 1960년대 시작한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에 이어 1977년 독도문화심기운동을 실천한 화가로서 최초로 ‘독도진경 개인전’을 열고 독도문화운동에 매진해왔다. 독도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훨씬 전, 쉽게 말해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가 나오기 5년 전부터 독도가 가진 문화적 상징성을 깨닫고, 그림을 통해 문화를 심어 이를 세계인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한 나라의 영토주권은 역사적, 학문적, 무력적 성과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마음속 깊이 각인돼 생활에서, 그리고 예술과 문화로 승화돼 표현되는 자생적인 문화관련 행위 자체가 실효적 영토 주권이며 수호일 것입니다.”

 

▲ 원형상-독도의소리III (2003)

 

혼을 담는 그릇, 영정의 대가
이종상 화백을 이야기할 때 화폐영정 제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한국에 방문하는 외국인도 사용하는 화폐 속 영정을 그리는 것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일이다. 그의 나이 37세에 5000원권을 그리면서 최연소 화폐영정 화가로 이름을 알린 후 30여 년이 지나 또 다시 5만원권이라는 최고액 권에 들어갈 신사임당의 영정을 그리면서 모자(母子)의 화폐 영정을 완성했다.

“5000원권은 본래 순종 어진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화원 이당(以堂) 김은호 선생이 그리기로 돼 있었으나, 이당 선생께서 병환으로 인해 그릴 수 없게 돼 화폐위원회의 어려운 내사와 복잡한 심사과정을 거쳐 저를 추천하셨습니다. 통상 할아버지벌인 당대 최고의 원로대가들이 맡았던 화폐영정 제작을 불과 서른일곱 살의 손자뻘인 청년 작가가 맡았으니,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지요. 그 이후 꼭 31년이 지난 뒤에는 현행화폐영정화가인 제가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자 또 정통영정의 육리배채(肉理北彩)기법을 알고 있을 뿐더러 복잡한 신원검증을 이미 끝마친 유일한 생존작가였기 때문에 최고액권인 5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화폐영정 제작을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종상 화백은 ‘얼’이 담긴 ‘꼴’을 ‘얼굴’이라 말한다. 즉 사람의 얼굴은 인품과 혼을 담는 그릇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상화와는 달리 영정제작은 혼을 불어넣는 무속의 접신 수준에 속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천상묘득(遷想妙得)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초상화는 이름이나, 인품을 몰라도 꼴인 외모는 사진처럼 실제와 똑같이 그릴 수 있지만 영정은 다릅니다. 영정은 그림자 영(影) 자에 족자 정(幀) 자를 씁니다. 그림자가 있는 건 실체고, 그림자가 없는 건 환상인 게지요. 그림자는 대상이 되시는 분의 인품과 업적과 혼을 뜻합니다. 그림자, 즉 그분의 삶에 철학과 정신을 존숭(尊崇)하는 의미에서 액정(額幀) 속에 모시는 게 바로 영정입니다. 영정을 그리기 위해선 그리려는 분의 혼과 접신하여 일치해야 합니다.”

이러한 그의 영정제작 철학이 바탕이 되어 뒤이어 그린 원효대사의 표준영정을 완성하기 위해 그의 사상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원효대사의 영정을 그리려고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이기영 박사에게 기신사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원효의 혼을 온전히 담으려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원효의 기신론을 공부한 것이 발단이 되어 동서비교철학으로 시작, 동양의 기철학 연구논문으로 10년 만에 인문계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국내 현역화가로서는 처음이랍니다.”

 

아버지의 재능, 어머니의 사랑, 훌륭한 스승
이 화백은 신사임당의 영정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율곡 이이를 훌륭히 성장시킨 신사임당처럼 이종상 화백 또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있었기 때문.
이 화백은 해방교육 1세대로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당시 9월 졸업을 앞두고 6·25 전쟁으로 인해 대전으로 피난을 가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이 화백의 어머니는 광주리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렵사리 아들을 자비로운 불교재단의 중학교에 입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대전의 명문인 대전고등학교에 당당히 진학한 그는 차마 어려운 집안 형편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취직이 용이한 서울공대 건축과로 진로를 정하고 3년을 이과반에서 공부했지만, 박관수 교장의 영향과 권유로 미술부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화가로서의 꿈을 다잡게 된다.

“박관수 선생님은 그 시대 사람답지 않게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적 안목을 갖고 계신 훌륭한 교육자 분이셨어요. 취미가 직업이 되는 시대가 올 거라며 고부가 창출의 창의력이 빛을 보는 2000년대 문화의 세기가 올 것이라고 그러셨죠. 꼭 미대에 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신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됐고 당시 제 입학등록금을 대신 내주셨습니다.”

그를 이끈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스승의 선구안이었으나, 재능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었을 터. 그의 예술가적 재능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어릴 때, 집 담장 안에 아홉 칸의 작은 동물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공간이었죠. 그 동물원에는 온통 두 발 달린 동물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 싶어 이응노 화백과 일본유학을 몰래 떠났으나 할아버지에게 잡혀와 당시 고등여학교를 막 졸업한 어머니와 결혼 후 다시 원예학자의 길을 걷게 된 아버지는 틈만 나면 우리 안에서 움직이는 금계, 칠면조 등 깃털 동물들을 그리곤 하셨지요.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게 미대생들도 어려워하는 속사 즉, 크로키였어요. 보통 사람에게 잔재영상은 16분의 1초를 넘기 힘들잖아요. 이걸 16초, 16분, 16시간으로 늘리는 게 화가의 능력이지요. 그 능력을 키우는 연습이 크로키입니다. 제가 서너 살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크로키를 흉내 내면서 자연스레 그림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지요.”

 

아랍에미리트에 알린 '우리 예술 우리 문화'

그의 예술혼은 국경을 막론하고 가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모습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인이 모인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이라면 누구나 부러움을 사는 대상으로, 나이 들어 그곳에 입성하기를 소망하는 곳으로 세간에 알려져있다. 이종상 화백은 명성에 걸맞게 대학정년과 함께 단 한 번에 입성하여 이름을 올렸다. 
지난 10월, 대한민국예술원이 아랍에미리트에서 특별전을 열며 예술원 회원들이 ‘코리아 페스티벌’에 초대됐다. 이종상 화백을 비롯한 19명의 작품이 전시 됐으며, 이종상 화백은 축하공연에서 국악공연 연주에 맞춰 즉석에서 동양화 전지 한 폭의 작품을 속사해보였다.

“연주 시간이 총 7분 남짓이었습니다. 7분 안에 동양의 멋을 선보일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난’을 그리기로 결정했지요. 공연 당일, 붓을 쥐었는데 문득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동양화를 뭉뚱그려 중국의 고유예술로 받아들일까 걱정이 됐기 때문입니다. 제가 또 오랜 시간을 독도 알리기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해 뜨는 독도’를 그려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세계인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계획을 바꾸게 됐습니다. 외국인들이 이게 무슨 섬이냐 물으면 당당히 우리나라 동쪽에 위치한 해 뜨는 섬이라고 설명할 기회가 생기는 셈이니까요.”

처음은 붓으로 시작했으나 그곳의 왕자 등 많은 내빈들이 박수와 함께 감탄사를 보내오자 이 화백은 자신도 모르게 신바람이 나서 손가락에 먹을 찍어 혈서 쓰듯, 지두화(指頭畵)로 화제 글씨까지 마무리 된 멋진 퍼포먼스를 펼쳤다. ‘지두화’에 내빈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쏟아냈다는 후문을 들으니, 이종상 화백은 대한민국 예술의 위상을 높이면서 독도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 (源形象-범죄없는마을) 101.5x136cm-1994銅釉畵-일랑미술관소장

 

통섭, 조화로운 미래를 생각하다
이종상 화백은 마지막으로, ‘원효기신론’을 근거로 최재천 교수의 ‘통섭론’을 강조했다. 

“지금 대학의 교육이 인문학적 기초가 부실한 채로. 전공의 세분화만 강조 돼가는 전문성의 주입식 교육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4차산업시대를 맞아 고부가 창출의 창의성 교육을 멀리하고 1차산업기의 분업화된 양산체제 교육으로 경도되어 수많은 전공의 분리효과로 자기전공만을 우선시하는 ‘전공바보’들을 양산하고 있는 꼴이지요. 창의성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원로 예술가로서 현 교육관과 분열된 사회상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지금이야 말로 조화로운 내일을 만들어갈 ‘통섭’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동반자, 든든한 조력자
이종상 화백은 인터뷰 말미에 팔순을 맞이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부부의 연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한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종상 화백도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아내 또한 이화여대 동양화를 전공한 예술인입니다. 초기에는 함께 작품활동을 했으나,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는 붓을 내려놓고 온전히 내조에만 힘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항상 마음속으로는 두명의 몫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며 작품을 만들어냈고, 아내는 제 작품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껴야 했지요. 아내의 희생과 봉사가 없었더라면 좋은 작품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이뤄낸 명성과 결과물이 아니기에 늘 고마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렇게나마 표현을 해봅니다.”

이종상 화백은 작품은 인품이라고 말했다. 작품과 인품을 달라질래야 달라질 수가 없다. 언제나 진실된 마음으로 붓을 잡는 이종상 화백. 그의 백년대계를 응원하고 싶다. 

취재_손경숙 기자 글_박예솔 기자

 

Profile

1963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8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수상
2003 『은관문화훈장』 서훈 (대통령 ‘03),
2005 『제1회 안견문화대상』 수상(안견기념사업회 ‘05)
2008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수상(한국언론인 협회 ‘08)
2010 『국가유공자 건국포장』증서수증 제11-22879호 (대통령 ‘10)
2011 『제1회 가장 문학적인 화가상』수상 (사)문학의집, 서울
2015 『제1회대한민국나라사랑 실천대상』수상(도전한국인본부)

개인전
1977 동산방 초대 최초의 독도 화가『이종상 진경전』
1990 프랑스 그랑빠레 최초 꼬레-부츠 개인전 『이종상 근작전』
1995 백남준 기획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초대전-『The Tiger's Tail』
1998 프랑스 문부성 TFAA" 초대『루브르미술관 까르젤 설치벽화』
2007 대전시립미술관 초대『한국현대미술의 거장-이종상』
2102 (사)한국미술사연구소 초대『현대한국대가-일랑 이종상 명품전』

단체전
1997『세계 80人화가』 선정전 Enrico Navarra, 파리
2003『제1~2회 북경비엔날레』 초대작가 북경박물관
2006『광주비엔날레 '열풍변주곡'』특별초대 작가전, 광주시립미술관
2011『한국현대미술전』(회화3인: 김환기,이우환,이종상) 메트로포리탄
2011 『UN남북동시가입 20주년남북평화미술전』초대출품 및
조직위원장
2012『제1회 몽유도원전』초대전Zaha Museum (사)안견기념사업회
2014『60년의발자취』대한민국예술원, 국립현대미술관주최, 덕수궁
2017『이종상과 랑우회-동음과 이음』사제3대전, 흰물결갤러리

경력
서울대학교미술대학교수 /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서울대학교미술관 초대 미술관장 
삼성문화재단 이사 / 한국조폐공사 자문위원 /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초대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장 및 건축위원장 /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회장 
문화체육관광부 동상영정심의위원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협의회 이사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독도문화심기운동 본부장 
일민문화재단 이사 / 고촌재단 이사 / 4.19혁명유공자회 회원 / 지문밖문화포럼 명예이사장  한국벽화연구소 소장 / 1호 보성명예군민 / (사)안평·안견현창사업회 고문 
대한민국해군 광개토대왕함 명예함장 / 고구려문화지키기운동본부장

대벽화
대법원 로비 / 서울지방법원 로비 / 검찰청 2로비 / 삼성본관 로비 / 연세대 세브란스 빌딩로비 / 수원성당 제대 / 태백산맥문학관 외벽 

성미술
서울 혜화동성당 / 경기 평택성당 / 전남 광주신학대학교 본당 / 한국최초 대전교구 신리순교미술관 순교기록화 봉헌 등 다수

박예솔 기자 yesall4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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