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규명은 어두웠던 과거동굴에 불 밝히는 국가사명

노용석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국제지역학부 교수

  • 입력 2022.04.04 17:20
  • 수정 2022.04.13 14:58
  • 기자명 서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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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멕시코 사이 수백 년에 걸쳐 경제 교류가 있었다. 16세기 말 이후 옥수수, 감자, 토마토, 파인애플, 피망, 땅콩 등이 멕시코에서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로 퍼져갔다. 오늘날에도 필리핀 관광을 하며 보면 중간 중간 라틴적 문화요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16세 중반 이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긴밀한 교역이 가능했던 핵심 원자재는 바로 '은'이었다. 스페인은 태평양 항로를 통해 멕시코와 페루에서 모아온 은을 마닐라로 옮겨 중국 상인과 거래했다.
그만큼 동남아시아의 지리적 요소는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정크선이 오갔던 이 바닷길은 바로 갤리언 무역항로이다. 필리핀에서 라틴 문화의 느낌이 나는 이유기도 하다. 부경대학교 노용석 교수로부터 역사규명 활동과 함께 왜 그가 틈만 나면 왜 남미로 달려가는지를 들었다.  

경산코발트 학살 진상규명의 주인공
얼마 전 1월말 국내 한 신문사에서는 역사 속 사실이지만 서로 말하기 힘든 '경산. 코발트 광산'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과거 일제시대 <춘길광산>이라는 이름으로 허가 받아 금은에 이어 코발트 광맥이 발견되면서 대규모 광산으로 탈바꿈했고, 1942년에만 6천 톤의 코발트를 생산해 식민지였던 조선땅 15개 코발트 광산 중 으뜸이었다. 전시 상황에서 코발트는 특수한 합금무기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광석이었다. 1944년 폐광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비극의 장소로 바뀌었다.

역사 속 세상에 수많은 이들이 연좌제로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고도 감당해야 했고 억울함이 쌓여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부경대학교 노용석 교수는 오랜 기간 '경산코발트 사건'을 현장조사하고 관계된 가족의 인터뷰를 진행해 왔다.

"기중기를 달고 엘리베이터 역할을 한 수직 갱도 깊이만 50미터였습니다. 아파트로 20층 정도죠. 그 수직갱도가 시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낙동강 전선이 만들어질 때에도 경산에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바뀌며 산에는 빨치산이 잔재했습니다. 그때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1950년 7월에서 9월사이 무작위로 처형했고, 총 3천 500명이 넘습니다. 부산・대구형무소 수감자를 비롯해 국민보도연맹원까지 매일 처형식이 이뤄졌습니다. 처음에는 전체를 총살하다가 나중에는 대여섯 명씩 줄로 묶고 앞사람만 죽여 떨구는 식의 참혹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노용석 교수가 들은 수백명의 증언에 따르면 남로당이 운영한 빨치산(산사람)은 주로 산에서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와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총부리를 겨누는 북한군에게 민간인은 있는 밥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낮이 되면 '북한군'을 봤다고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신고한 사람들을 모아 '국민보도연맹원'이라 불렀다. 그들은 순수하게 정부가 시킨 대로 신고했지만 그들 사이 북한군이 섞였다는 정보가 돌며 6.25 이후 모두 처형당했다.

"아무리 농사만 짓고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이미 내통했다고 보는 겁니다. 사실은 내통이 아니라 국민의 의무를 다한 순박한 사람들이죠."
한 명, 두 명에서 시작해 수 십명의 증언으로 이어지자 점차 그늘 속의 역사는 드러났다.
"전쟁 후에도 일반 백성들은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이죠. 남한이나 북한 어느 쪽 손을 들어도 반대쪽에도 죽이려 했으니까 힘이 강한 쪽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8년 노 교수는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발굴 팀장으로 활동하며 코발트 광산을 먼저 발굴 준비했다.
하지만, 이런 유해발굴의 선례가 국내에는 없어 전 세계의 케이스를 검색하다 남미쪽에서 비슷한 사건을 찾았고 국가매뉴얼을 발견했다.

"아르헨티나의 유해발굴팀이 있다는 소리에 홈피를 찾아 들어갔죠. 한데, 스페니시로 다 적어둔 거에요. 할 수 없이 스페인어를 독학 시작했죠. 책에서 기초를 익히고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내전이 있던 남미로 달려갔어요. 과테말라나 엘사바도르의 내전은 거의 198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라 아직까지 유족이 많아요. 그래서, 그들은 유해를 발굴하고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발굴해도 대부분 가족을 찾기 힘들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해 발굴 후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DNA검사를 할 수 있지만, 한국의 상황에서는 전수 검사를 하기 힘들다고 노 교수는 말했다.
한국에서는 발굴한 유해를 어떻게 처리하고 위령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남미처럼 간단하게 유족에게 돌려주는 식과는 달리 분단인 현상황과 70년이 넘는 역사적 시간에 맞게 움직여야 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은 이미 정권이 뒤바뀐 이후 유족의 주장을 편안히 받아들이며 진행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국가 암흑기에 벌어진 일이고, 유족에게 법원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약간의 보상을 받는 정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국가나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민간인이 함부로 다뤄지거나 처형을 당한 사실은 전세계 비일비재 했습니다. 이런 인간의 잔혹사 끝은 들으면 끝이 없었어요. 그래서 전 '성선설'을 잘 안 믿습니다."

학생들이 먼저 인정하는 명강의
노 교수는 현지 조사를 하며 라틴 아메리카를 왕래하는 일이 잦아졌다. 바쁠때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갈 때도 있었다.

"스페인어의 경우 동사 하나가 72가지로 변화합니다. 기본 동사 5만 개를 외운다고 해도 전체 몇개를 더 외워야 할까요? 산술적으로는 배우지 못하는 언어이죠. 하지만 언어는 자신의 목적이 있고 관심을 두면 되더라고요. 이런 경험의 이야기를 학생에게 많이 전해주려 합니다. 제가 전공이 언어가 아니라 인류학이니 충분히 현장에서 대화하며 문화를 이해하며 배우는 언어습득은 아무래도 '책상머리공부'만 강요받던 학생들에게 좀 신선하게 다가왔나 보죠."

노용석 교수는 수천의 영혼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두 어깨가 무겁다. 
"지난 10여년 흘러온 과정이 억울한 영혼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올해 연구년을 지내며 곧 3월에 멕시코로 출국합니다. 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를 돌 것인데 세계적인 연구기관과 함께 부산의 도시특성을 연구하고 연계성을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이전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일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여러 남미의 모델과 사례를 더 많이 듣고 한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비교 연구해야죠. 글로벌 지역학회의 회장으로서 국내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루고자는 야심도 있고요."

 

Profile
글로벌 지역학회 회장 (2022~)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유해발굴조사팀 팀장
한국구술사학회 이사
한국문화인류학회 연구위원장

주요저서 
<트랜스내셔널 노동이주와 한국(공저)>
<국가 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과테말라 내전 원주민 학살의 전개와 배경>
<이주와 불평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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