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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학과', '의대 밴드', '작가'…MZ세대들의 핫한 키워드를 모두 가진 한상석 박사님

기사승인 2022.06.16  17: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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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석 부산제2항운병원 영상의학과 원장 / 의학박사 / 출간 작가

삶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다. 제아무리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권력자라도 두 번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드물게 한 번의 삶을 여러 번의 삶처럼 살아가는 이도 있다. 
출발선에선 남들보다 늦었다. 갓 두 살 때 소아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다. 병은 회복되었지만 신은 끝내 건강한 두 다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다른 자식들과 똑같이 대했다.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그룹사운드 싱어로 활동했다. 정상적이지 않는 걸음으로 남들처럼 무대에 섰다. 의대 교수로 36년 가까이 근무했다. 처음엔 아무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장애의 차별은 서러웠다. 
그는 이제 글을 쓰는 작가다. 자전소설 출간을 준비 중이다. 많이 받은 만큼 되도록 많이 돌려주려 한다. 벌써 몇 번째 삶을 사는지 모른다. 장애인으로, 음악인으로, 의사이면서 작가로. 그는 아직도 꿈꾸고 있다.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아름다운 세상을. 피플투데이가 40년 동안 환자를 진료해온 영상의학계의 권위자이자 작가인 한상석 박사님을 만났다.  

Q.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직업 중에 의사가 되기로 다짐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A.
전 두 살 때, 심한 소아마비로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사지가 마비되어 서지도 앉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두 번에 걸친 정형외과 수술과 2년 동안의 재활치료로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엔 보조기를 신고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제가 받았던 현대의학의 혜택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입은 은혜를 저 같은 환자 치료에 헌신함으로써 되돌려주고 싶었던 거지요.

Q.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에 장애인으로서 겪은 차별이 많았을 거라고 예상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몇 가지 이야기해 주세요.
A.
한 번씩, 젊은 시절 당했던 차별과 거부와 모욕 등이 생각날 때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답니다. 남들이 생각할 땐 의사란 전문직 사회에서 그런 일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냐 싶겠지만 현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에 관한 내용은 앞으로 발간될 저의 자전적 소설 「보조기」에 자세히 나오겠습니다만, 가장 큰 차별은 결혼과 취업 때였지요.
결혼할 때는 지옥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했고, 의사면허증을 딴 후에는 인턴·레지던트로 받아주는 데가 없어 투명인간 취급, 거지 취급받아 가며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우연한 기회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방사선과(現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로 들어가게 되어 뜻하지 않게 영상의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Q. 박사님께서는 수많은 차별에도 불구하고 참 긍정적이시고, 나를 차별한 세상에 대해 별 불만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를 극복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 하나를 들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그건 부모의 교육과 양육 태도 때문이라고요. 저는 4형제 중 셋째인데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저를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종아리를 맞을 때도 같이 맞았고요. 그러면서 아버지는 저에게 ‘넌 결코 남과 다르지 않아’라는 말을 주문 외우듯 하면서 자신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결과, 많은 장애인이 겪는 과보호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자립심을 기를 수 있었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Q. 현재는 글 쓰시는 게 취미라고 들었는데, 대학 시절 취미생활은 무엇이었나요? 취미생활하시며 생각하는 에피소드도 같이 이야기해 주세요.
A. 제가 태어날 때 받은 탤런트 중 가장 큰 것은 음악, 그중에서도 노래인 것 같습니다. 어려서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고1 때부터는 기타를 쳤고, 대학 들어와서는 ‘보리어스’라는 통기타 듀엣 팀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부산의대 그룹사운드인 ‘메디칼포’ 싱어로 활동하면서 부산 대학가의 음악 무대를 휩쓸었지요. 지방 신문에는 우리 팀에 대한 소개기사가 나가고 T.V. 방송의 쇼 프로에도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낙제’라는 쓰디쓴 열매가 맺히더군요. 

Q. 실례가 될까 조심스럽습니다만, 혹시 무대에 나갈 때 불편한 걸음걸이가 신경이 쓰이진 않으셨나요? 
A.
첫 무대에 설 때 그랬지요. 모든 시선이 내 걸음 하나하나에 쏠린다 생각하니 얼마나 부담스럽던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로 말하지 발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다짐하며 그 핸디캡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Q. 의사로서 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고 알고 있는데, 특별히 교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의사가 되고자 한 것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제가 받은 혜택과 은혜를 널리 나누어주고자 함이었지요. ‘그럼 어떤 길이 그 목적에 가장 잘 맞을까?’하고 생각해 보니 의대 교수가 되는 것이 정답인 것 같았습니다. 일반 병원 봉직의나 개원의의 경우 한 개인의 ‘진료’ 하나로 끝나지만, 대학병원 교수직은 진료를 통해 환자를 돌보고, 연구를 통해 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교육을 통해 훌륭한 의사를 양성해 낼 수 있으니 파급효과 측면에서 볼 때 이만한 직종도 없다 싶었지요.

Q. 2018년, 정년퇴임과 함께 인문학 저서 출간으로 인생 2막을 의사가 아닌 작가의 길로 열어가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A.
35년 6개월 동안의 의대 교수 생활을 마감하면서 제가 받은 일차적 소명은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인생 제2막은 지금껏 장애인으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살아온 저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큰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작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Q. 박사님 말씀대로 요즘 2030 세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참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이 세상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은 현실의 벽이 절망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요.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문은 열리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자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열릴 때까지 두드리다 보면 문은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의 장벽 중에 평생을 따라다니는 장애만큼 큰 장벽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 경우가 그랬듯,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을 하늘은 그저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기회의 여신은 오늘도 준비된 자를 찾아다니지요.

Q. 마지막으로, 장애인으로서 이 사회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장애인은 결코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리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고요? 불의의 사고로 급사하지 않는 한, 인간은 누구나 죽기 전에 한 번은 장애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고 해서 장애인을 차별하고 경멸하는 것은 장래의 나를 학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애라는 장애물을 함께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사회는 진정한 선진사회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야말로 훈훈한 사람 냄새 풍기는 아름다운 세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설은주 기자 giver-@naver.com

<저작권자 © 피플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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