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화 기생충, '하향의 문'을 묻다

  • 입력 2019.06.25 19:31
  • 수정 2019.06.25 19:36
  • 기자명 조신애 K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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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는 너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관계 맺는가? 주체와 타자에 대한 통찰은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접근되었다. 이것은 특별한 학문을 통해서만 묻고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상관없다. 누구나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한 번쯤은 물었을 흥미로운 질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을까?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Husserl)은 우리가 타자를 인식할 때 선험적인 경험을 대상에 '투사'한다고 이야기한다. 투사는 각자의 경험의 필터에 영향을 받는다. 정신분석 용어에서 '투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죄의식, 열등감, 공격성과 같은 감정을 돌리는 방어기제이다. 감당하기 불편한 것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우리의 생존 전략이다. 나의 부정적인 면을 마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는 수용하지 못한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 버린다. 그러다 보면 점점 전체성을 잃고 조각의 일부분으로 살아간다.

무의식의 열등 인격. 항상 트러블 메이커의 사람이 있다. 유연하지 못한 성격에서 그 사람의 상처를 발견한다. 사실 완고함은 그 사람의 아픈 경험이다.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된다면 마음을 살피는 것이 도울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만스러웠던 상대의 모습 한가운데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 나의 '열등한 인격'이 있다. 그것은 자아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이다. '그림자'이다(Carl Gustav Jung). 일상에서 외면하고 소외시킨 나의 일부이다. 불편한 감정이 들면 '아 몰라, 생각하기 싫어. 그냥 잊어 버려'하고 떨쳐버리기에만 급급했다. 남겨진 찝찝함과 부적절감은 망각의 호수에 잠시 잠겨 있다가 어느새 우리 삶에 범람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의식만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자만이다. 보이는 것 너머에 더 커다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겸허한 시선이 필요하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심리 내적 구조로써 본, 영화 <기생충>
하지만 내면세계는 쉽게 볼 수 없다. 무한한 심연처럼 들어가기 어렵다. 내 안에 있지만 속속들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마음을 마치 엑스레이 찍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을 보는데 개인적으로 재밌게 와닿았다. '아 저것 참, 꼭 사람의 심리 내부를 내시경으로 보듯 보여주네'. 영화 속에서 비춰주는 인물들의 삶에서 인간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의 대비를 연상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 높은 사회계층인 박 사장과 아내의 당당한 모습. 반면 소외된 계층의 추레한 기택의 가족들. 그리고 박 사장네의 지하벙커에서 몰래 숨어살다 발견된 문광과 그의 남편. 내려갈수록 눈살이 찌푸려졌다. 존재 자체도 무시당한 채 살아가는 열등한 인격체들은 마치 내가 추방한 나의 일부처럼 보인다. 한집에 살지만 서로의 거리가 무한한 심연처럼 건너기 어려운 이들. 공생(共生) 하고 있지만 상생(相生) 하지는 못하는 심리 내부의 어수선한 구도 같았다. 심리 내적 구조로 보자면 저 중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나라도 내칠 수 없는 나의 일부이다.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규명된다. 밝음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고 어두움이 없는 것이 밝은 것이다. 의식이 없는 게 무의식인 거고 무의식이 없는 게 의식인 것처럼. 사실은 하나이다. 개인의 삶에서 보자면 그중 어느 게 낫냐는 묻는 물음보다 서로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더 중요하게 보인다.

양극의 조화
사실 우리는 우리의 긍정적인 면들을 자원 삼아 험난한 세상을 걸어 나간다. 그것들은 삶을 밝혀주고 이끌어 주는 등불이다. 하지만 태양을 보는 우리 뒤엔 늘 그림자가 생긴다. 진정한 삶의 변화와 창조는 우리의 그림자까지 포용했을 때이다. 그 양극의 조화(Carl Gustav Jung)를 이룰 때 창조성이 발현된다. 삶의 진정한 변화와 창조는 대비되는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때 일어난다. ‘나와 너’가 싸우고 화해하면서 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라 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것들이 그저 함께 존재하는 것만이 아닌 서로를 유지하는 동시에 부정하면서 역동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화는 양극의 우리 마음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마음의 균형은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 소통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하다. 우리가 진정한 삶을 창조하는 순간은 바로 그렇게 무수히 다양한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룰 때이다. 이것은 비단 개인의 심리 내적인 성장을 위해서만 도전하게 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관계의 망 속에서도 나와 다른 낯설고 불편한 타인을 환대하는 태도를 갖아야 한다(Emmanuel Levinas). 진실은 매우 단순한 데에 있다. 존재는 서로를 통해 의미가 있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만든다.

 

남루함을 끌어안고
그러니 이제 각자의 그림자와 만나자. 그들이 무의식에서 보내는 신호에 예민하자. 내 안엔 어떤 경험의 필터가 무엇인지, 그것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아는 것은 힘이 된다. 나는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날카롭게 자신에 대해 통찰해야 한다. 그 가운데 자신의 모자라고 추한 부분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도 몰랐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편한 진실의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야 드러난다. 하향의 걸음이다. 완벽한 자신이 아닌 온전한 자신을 수용하는 길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구조와 체제의 변화에 관심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개인이 자신의 심리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우위를 나눌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나 자신의 구조가 무너져 있고 헝클어져 있다면 지금 잠시 멈추어야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자. “이제 그 하향의 문 앞에서 노크를 하라” 자신만의 진정한 자아의 조각을 찾는 것은 납이 금이 되는 연금술의 과정이다.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이야기처럼 이것은 온전히 스스로의 주인으로 사는 일이다. 자신만의 신화를 이루는 여정이다. 

Profile 
연세대 상담코칭학 석사
(사)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KPC(Korea Professional Coach)
에니어그램 전문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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